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타람 술탄국 (문단 편집) === 계승 전쟁과 네덜란드 종속 === 이후에도 마타람 술탄국은 고질적인 계승 문제로 세 차례의 [[자바 왕위 계승 전쟁]](1차 1704–1708, 2차 1719–1723, 3차 1749–1757)을 겪어 지속적으로 국력이 과도하게 소모되었다. 또한 자바와 수마트라의 지배체제 구축을 노리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세력이 자바 왕위 계승 전쟁 때마다 개입하여, 네덜란드의 편에 선 세력이 제1차와 제2차 계승 전쟁을 승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가 마타람의 내정에 점점 더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마타람이 네덜란드에 종속적인 위치로 존속하던 1740년, 바타비아에서 화인들의 반네덜란드 봉기가 발생하였으나 곧 진압되었는데 후환을 우려한 네덜란드인들은 바타비아의 비화교계 거주민 집단과의 합의 하에 1740년 10월, 2주에 걸쳐 1만 명에 달하는 바타비아 화인을 학살하게 된다. 케 판장(Khe Pandjang)이 이끄는 화인 학살의 생존자들은 우선 가까운 [[반튼]]으로 가서 반튼 술탄국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반튼 술탄은 이들과 연대하기를 거부하였고, 결국 화인 무리는 자바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스마랑]]을 향해 이동하며 마타람 술탄국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마타람의 파쿠부워노 2세(Pakubuwono II, 재위 1726–1749)는 일단 겉으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계속 협력하였지만 물밑으로는 도망쳐 온 화인들을 도왔으며, 이에 따라 화인과 자바인이 연합하여 동인도 회사에 대항한 [[자바 전쟁]](1741–1743)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은 결국 동인도 회사가 승리하고 마타람에서 북부와 동부 영토를 평화의 대가로 받아냄으로써 종료되었지만, 다음 세기에 발발한 본격적인 반네덜란드 항쟁인 [[디파나가라 전쟁]](Perang Diponegoro, 1825–1830)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격렬했던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네덜란드가 반란군의 탁월한 두 지도자 망쿠부미 공(Pangeran Mangkubumi)과 라덴 마스 사잇(Raden Mas Said)의 선전으로 고전하였지만, 망쿠부미 공과는 1755년 그의 주장을 인정하여 마타람 영토의 절반[* 이때만 하더라도 마타람 술탄국의 기존 강역은 [[스마랑]] 등 북부 해안 지대를 제외한 오늘날 [[중부자바|중부자바주]] 대부분과 오늘날의 [[동부자바|동부자바주]]에서 블람방안 반도와 [[수라바야]]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으로, 오늘날 욕야카르타 특별 지역 및 수라카르타의 배후지를 합한 지역보다 훨씬 컸다. 번왕국의 영토는 마타람 분리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 등 식민 세력의 개입으로 점차적으로 축소된다.]을 떼어 주기로 함으로써 타협에 성공하고(기얀티Giyanti 조약, 1755년 2월 13일) 간신히 전황을 호전시킨다. 남은 라덴 마스 사잇의 세력도 만만찮아 기얀티 조약 체결 후인 1755년 10월에도 동인도 회사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1756년 2월에는 네덜란드와 타협하고 적으로 돌아선 망쿠부미의 [[욕야카르타]]를 공격해 신축한 궁전을 불태우는 등 분투했지만, 동인도 회사와 파쿠부워노 3세의 수라카르타, 망쿠부미의 욕야카르타 모두와 대립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전체적으로는 교착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1757년, 결국 라덴 마스 사잇이 협상을 거쳐 수라카르타의 파쿠부워노 3세에게 형식적으로 항복하고, 수라카르타에서 영토를 받아 공국을 다스리게 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wiki style="float:center;text-align:center" [[파일:777px-Jawa_Setelah_Perjanjian_Giyanti.png|width=600]][br]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중부 자바의 영토 분할}}} 결국 마타람 술탄국은 [[수라카르타 수난국]], [[욕야카르타|욕야카르타 술탄국]], [[망쿠나가란 공국]]의 세 [[번왕국]][* [[네덜란드어]]로 Vorstenlanden. [[영국령 인도]]의 [[인도 번왕국]]과 비슷한 개념으로 네덜란드가 간접통치하는 자바의 토착 왕국을 의미한다. 원래는 이상의 셋이었으나 1812년에 영국이 잠시 자바를 점령했을 때 영국을 도와 욕야카르타 술탄국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영국이 나타쿠수마(Natakusuma)에게 욕야카르타 일부 영토를 주어 파쿠알람(Pakualam) 1세로 삼아 파쿠알라만 공국이 덧붙여졌다.]으로 분리되어 각각이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되었고, 기존의 마타람 술탄국은 소멸하였다. 네덜란드와 대립하던 망쿠부미 공은 욕야카르타의 초대 술탄 하믕쿠부워노 1세(Hamengkubuwono I, 재위 1755–1792)가 되었고, 네덜란드가 처음부터 지지했던 마타람의 수수후난 파쿠부워노 3세(Pakubuwono III, 재위 1749–1788)는 그대로 수라카르타의 수수후난이 되었으며[* 여기서 '하믕쿠부워노'(ꦲꦩꦼꦁꦏꦸꦨꦸꦮꦤ, Hamengkubuwana. 자바 문자에 따르면 두 번째 음절은 '멩'이 아니라 '믕'이다.), '파쿠부워노'(ꦦꦑꦸꦨꦸꦮꦟ, Pakubuwana) 등의 표기에는 예외적으로 자바어 마타람 방언의 어말 모음 변화 'a'→'o'를 적용하였다. 이들의 인명을 현대 인도네시아어로 표기하는 경우 어말 모음 변화를 반영하며, 이들의 인명은 이미 인도네시아어에서 한국어로 종종 옮겨졌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라덴 마스 사잇은 망쿠나가란 공작 망쿠나가라 1세(Mangkunagara I, 재위 1757–1795)가 되었다. 단 분리된 번왕국 가운데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네덜란드의 통감(resident)이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호국이었으나, 현실적으로 18세기 중반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이 지역의 내정에 간섭할 여지는 크지 않았고, 사실상 독립국으로 존재하였으며 독자적인 외교권, 사법권, 군대를 보유했다. 18세기에 욕야카르타 술탄국에서 네덜란드 통감은 토착민 재상(프파티 달름pepatih dalem)과 동격으로 술탄의 신하였다. 그러나 단덜스 총독 시대부터 욕야카르타 통감이 술탄의 명령을 받지 않는 총독 직할직이 되었으며, 이어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래플스]] 부총독 시대부터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외교권과 군권이 박탈되었다. 디파나가라 전쟁이 종결된 1830년 무렵부터는 반란의 재발을 막기 위해 욕야카르타에 대한 식민 통치 기구의 행정적 간섭이 심해져 명실공히 욕야카르타가 네덜란드의 종속국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이 시점부터 욕야카르타 술탄위 계승권은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과의 합의가 있어야 유효하게 되었고, 술탄의 사법권마저 식민 정부의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